,

호주 최초의 프랑스인 프랑수와 가족 이야기

Posted by

호주 최초의 프랑스인 프랑수와 가족 이야기

지난 시간 최초의 일본인 사쿠라가와 리키노스케 씨의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과거 코클 베이(Cockle Bay)로 불리며 시드니의 초기 역사에서 가난한 이웃들의 거주지였던 달링 하버에 정착한 호주 최초의 프랑스인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달링 하버는 과거 코클 베이(Cockle Bay)로 불리며 시드니의 초기 역사에서 가난한 이웃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1808년 프랑스 남부 출신의 한 선원이 동성애라는 죄목으로 추방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호주로 이주한 최초의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프랑수아 피에우다드 씨의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해인 1789년에 태어난 그는 키가 작으며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남성이었습니다.

프랑수아 씨의 삶에 대한 연구는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는 최초의 이주민들 중 가장 신비로운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영국에 머무는 동안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삶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사건이 됩니다. 영국 법원이 그에게 내린 판결은 동성애 혐의였습니다.

피터 드 발(Peter de Waal, Vahl)씨는 호주연구원이자 활동가로, 스스로를 동성애 역사 문서 작성자라고 정의합니다.

피터 박사에 따르면 당시 영국과 호주는 동성애 행위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있었습니다.

“1788년 호주가 식민지가 되었을 때, 동성애 행위 관련 법에는 사형이 포함됐습니다. 초기에는 약 6명의 남자들이 교수대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수아 관련 재판 회의록에는 그가 프랑스 이름을 가진 암브루아즈 모린과 함께 저지른 이른바 “자연스럽지 못한 범죄(unnatural crimes)”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암브루아즈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습니다.

프랑수아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추후 호주로 추방되는 것으로 감형됐습니다.

그는 1808년 “감비어 제독(Admiral Gambier)”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시드니에 도착하게 됩니다.

“현대 사회 기준으로는 빵 한 덩이를 훔쳤다고 해서 다른 나라로 사람을 추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남성끼리 성관계를 했다고 해서 사람을 다른 나라로 내보내는 것도 마찬가지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이렇게 호주에 정착한 최초의 프랑스인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추방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설명 방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드니대학교의 유럽사 전공 로버트 앨드리치 교수는 성소수자(LGBTIQ+)들의 권리에 대한 책을 집필한 전문가입니다.

그는 당시 프랑수아 피에우다드 씨가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하는 방식처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동성애라는 단어는 1860년대에 생겨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심지어 해당법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 남색(sodomite)이나 변태라고 불렸을 것이고, 자신이 남자에게만 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요즘 우리가 양성애자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시드니에서 프랑수아는 1818년 시드니에 도착한 죄수 호노라 아헨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부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녀가 카톨릭 신자였고, 아마도 아일랜드인이었다는 것뿐입니다.

최초의 중국인과 최초의 일본인들처럼, 호주 최초의 프랑스인 이민자는 분명히 아일랜드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로버트 앨드리치 교수는 프랑수아 씨가 현재 기준으로 상황적 동성애라고 불리는 것이 틀림없다고 추측합니다.

“적어도 사용된 단어를 볼 때, 그것은 더 최근의 개념입니다. 동성애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성적 욕구때문에 동성애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 파트너가 부족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여성이 거의 없었던 아웃백 지역에서는 특정 동성애 활동이 행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수아 피에우다드 씨는 프랑스가 동성애에 더 관대하고 관련 법이 덜 집행됐다는 것을 감안할 때 자신의 형량의 가혹함에 놀랐을 수도 있습니다.

“형이 덜 집행되다가 프랑스 혁명 후 비범죄화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는 동성애에 대한 수난 역사가 있습니다. 물론 영국인들은 이에 대해 더 보수적인 개신교였습니다.”

이처럼 프랑수아 씨의 추방 사유는 그를 호주 현지에서 곤란한 위치에 놓이게 했을 수 있습니다.

“경찰에 갇히는 경우도 많았고, 경찰관에 의한 학대나, 교도소 내에서 일부 성적 학대를 포함한 온갖 신체적, 정신적 학대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죄수들이 호주에 온 사유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사유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적인 정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호주의 많은 사람들은 영국 법에 따라 범죄 경력이 기록됩니다.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죄수 출신임을 부정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남성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과거를 지어내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아마도 절도와 같은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시드니에 도착한 프랑수아 피에우다드 씨는 지금의 달링 하버에 정착했습니다.

당시에는 코클 베이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오늘날의 값비싼 동네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산업화가 한창인 다소 거친 지역이었습니다.

록스 박물관(The Rocks Discovery Museum)의 큐레이터인 웨인 존슨 씨는 시드니의 초창기 개발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1810년대 초는 달링 하버가 막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1813년에 도착한 존 딕슨이라는 산업가가 증기 엔진을 갖고 왔는데, 유럽 밖으로 수출된 거의 최초의 증기 기관이었죠. 이것은 많은 다양한 산업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양조장도 설립됐습니다. 이곳은 실제로 상당히 중요한 산업 중심지가 됐습니다.”

سیدنی

Source: AAP

프랑수아 씨는 켄트 스트리트에 집을 구했는데, 그 곳은 오늘날 달링 하버의 주요 거리가 됐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새로운 거리였습니다.

“켄트 스트리트는 맥쿼리 주지사가 만든 도로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달링 하버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였습니다. 또 1811년에는 시드니 마켓이 록스에서 지금의 퀸 빅토리아 빌딩쪽으로 옮겨졌습니다. 호크스베리나 다른 곳에 온 선박들이 제품을 내려놓고 시장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켄트 스트리트는 1820년대에 상당히 번화한 지역이 됩니다.”

한편 죄수로서의 과거사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 피에우다드 씨는 경찰관이 됩니다.

“맥쿼리(Macquarie) 주지사는 또한 도시를 5개의 경찰 관할 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각각의 구역에는 감시소가 있었습니다. 프랑수아 씨가 일했던 감시소는 컴벌랜드 스트리트에 있었습니다. 시드니 하버 관리 당국이 발굴을 통해 예전 건물의 잔해를 발견했는데 그곳이 프랑수아 씨가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경찰서였을 것입니다.”

이것 이상으로 그의 삶에 대한 더 많은 기록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1829년 시드니를 긴장시킨 유명한 스캔들, 제인 뉴 사건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캐롤 백스터는 작가이자 계보학자이며, 제인 뉴 사건에 관한 책을 쓴 저자입니다.

제인은 화려한 옷을 훔치는 것을 즐기는 여자였다고 합니다.

“제인은 도둑질에 대한 열정에 휩싸였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물건을 훔치는 것에 의존해 살았습니다. 제인의 남편의 벌이가 꽤 좋았을 때도 그녀는 다시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실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인 뉴는 달링 하버 지역의 유명한 쇼핑객인 조세핀 런의 옷을 훔쳐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런 씨는 벨기에 출신으로 호주로 이주한 최초의 벨기에인일 수 있습니다.

당국이 제인에게 너무 가혹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시드니 주민들의 여론이 형성되면서 이 사건은 확대되었고, 전 죄수들의 권리를 위한 대의명분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캐롤 백스터 작가는 판사의 수첩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름이 언급된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프랑수아 피에우다드 순경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 사건과 정확히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프랑수아 순경이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런 씨 부인이 실제로 영어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수아 씨가 관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런 씨 부인은 자신의 딸에 통역을 맡겨야 했었기 때문에 저는 그가 이 때문에 관여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켄트 스트리트 근처에서는 프랜시스 지라르라고 불리는 또 다른 프랑스인이 그 직후 정착해 저명한 기업가가 되었고 조세핀 런과 친구 사이였습니다.

재판의 회의록에 따르면 런 씨 부인은 처음에 지라르 씨에게 통역을 부탁했지만 법원은 그의 통역을 신뢰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통역을 위해 법원이 통역할 사람으로 프랑수아 순경을 데려오게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캐롤 박스터 작가는 당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식민지 사회의 강직한 인물들 중 일부는 제인이 정직한 여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인은 범죄를 저지른 죄수였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영국의 적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혐오증 등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프랑스인들보다 벨기에 출신인 제인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알렉시스 버간츠 씨는 로열 멜버른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Royal Melbourne Institute of Technology)의 강사로, 초기 프랑스인들의 호주 이주에 관한 책을 쓴 저자입니다.

버간츠 강사는 프랑수아 씨가 처음에는 적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외면당했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상황은 대영제국이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마 호주에 도착하는 프랑스인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1815년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바뀌었고, 두 나라는 더 긴밀하게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문화가 1800년대에 영국에서 높은 가치와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론 호주에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프랑수아 씨는 아마도 처음에는 매우 고립된 생활을 했을 것이지만, 프랑스로부터의 호주 이주는 이 후 개방됩니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19세기 중반까지 호주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의 총 수는 약 400명이었고, 아마도 그 중 4분의 3이 시드니에 기반을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인의 존재는 1890년대에 정점을 찍었고 19세기 말 에는 약 4,500명이 존재했습니다. 이들 덕분에 그들은 더욱 굳건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결국 동성애를 이유로 프랑스 땅에서 호주로 추방된 프랑수아 피에우다드 씨는 마침내 호주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호주 최초의 프랑스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