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최초의 일본인 시키노스케 가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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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최초의 일본인 시키노스케 가족 이야기

호주의 최초 일본인이라는 기록이 전해지는 사쿠라가와 리키노스케 씨의 후손들은 잘못 전해내려온 성 씨로 인해 자신을 폴란드계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헤버턴(Heberton )은 퀸즐랜드 주 테이블랜즈 지역의 작은 마을로, 케언스에서 남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합니다. 이 곳이 1873년 도쿄의 한 서커스 곡예사가 호주에서의 첫 걸음을 내딛은 곳입니다.

바로 호주로 이주한 최초의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사쿠라가와 리키노스케 씨의 이야기입니다.

퀸즐랜드 선샤인 코스트에 살고 있는 가빈 디키노스키 씨는 자신의 성이 폴란드계 성이라고 생각하고 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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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폴란드가 아닌 일본 성을 가진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디키노스키는 어디에서 온 성이냐고 물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 저건 폴란드어야!”라고 말했죠. 그럼 저는 항상 아니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러시아 성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는 제가 일본계라는 것을 전혀 몰랐고, 디키노스키 가족 모두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호주로 온 대부분의 초기 이민자들은 그들의 이름을 들리는 대로 적은 담당직원들로 인해 실제로 이름이 엉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름이 실제로 쓰여지는 스펠링과 발음이 매우 다른 언어들의 경우 영어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이 아닌 다른 언어일 경우에 이런 일은 더욱 흔히 발생했습니다.

1873년 일본 출신의 리키노스케라는 사람이 멜버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름이 잘못 불리는 극단적인 사례가 됩니다. 호주 서류에는 리키노스케에서 디키노스키라는 이름으로 잘못 작성되고 만 것이죠.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그는 호주 어딘가의 부두에 있던 한 남성의 안내를 받았는데, 호주에 도착 후 등기부나 명부에 이름을 적을 때 자신의 이름 철자를 쓰거나 발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쿠라가와 리키노스케 씨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의 많은 후손들 중 한 명인 스티브 도슨 씨에 의해 수집됐습니다. 도슨 씨의 어머니는 바로 호주에서 철자가 틀리고 폴란드어로 들리는 성을 갖게 된 디키노스키 씨입니다.

“제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은 우리가 폴란드 혈통이라고 믿으며 자랐습니다. 선조의 이름은 사쿠라가와 리키노스케였고, 그는 저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고조할아버지는 영어 이름 레지널드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습니다. 즉 레지날 사쿠라가와 디키노스키였죠.”

사쿠라가와 리키노스케 씨는 아들 한 명을 데리고 호주에 왔고 아들의 이름은 이와르 디키노스키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아일랜드 여성과 결혼하면서 호주에 정착하게 됐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873년 7월에 호주에 도착한 후, 사쿠라가와 씨는 멜버른에서 제인 커라는 이름의 아일랜드인 바텐터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매우 빠르게 가정을 꾸리면서 9년 동안 4명의 아이를 낳았고, 사쿠라가와 씨는 퀸즐랜드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스티브 도슨 씨는 고조할아버지가 두 번째 가족을 꾸린 것일 수도 있으며, 첫째 아들 이와르도 호주로 오기 전 일본에서 입양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조할아버지가 예전에 결혼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호주로 오기 전에 일본에 아내가 있었지만, 이미 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7살짜리 아들과 함께 호주에 도착했지만 생물학적인 아들인지 아니면 입양된 아들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도슨 씨는 고조할아버지인 사쿠라가와 씨와 아들 이와르 씨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전했는데요, 바로 그들은 서커스 곡예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 번의 특별 공연을 했습니다. 하나는 느슨한 철사라고 불리는 공연으로 흔들리는 줄 위에서 튕기며 공연했고, 그 움직이는 줄 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피아노 와이어 위에서도 이것을 해냈습니다. 잘 알려진 다른 공연은 사다리 연기라는 공연으로 어깨에 사다리를 걸치고 그 사다리 위에서 아들은 위로 올라서며 온갖 묘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후 사쿠라가와 씨와 그의 아내, 아이들은 디키노스키 서커스단으로서 퀸즐랜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공연 투어를 다니게 됩니다.

그들의 공연을 알렸던 많은 전단지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심지어 그가 이와르와 함께 있는 사진도 존재합니다.

호주와 일본 간의 관계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는 나가타 유리코 박사는 스티브 도슨 씨의 사쿠라가와 연구에 협력해오고 있습니다.

나가타 박사는 사쿠라가와 씨가 서커스 예술가였다는 것이 놀랍지 않다고 말합니다

“200여 년 동안 일본은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걸어 잠갔고 아무도 그 나라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랬던 일본이 그 폐쇄 정책을 해제하자마자 가장 먼저 출국한 사람 중 한 명은 곡예사들이었습니다.”

나가타 박사는 사쿠라가와 씨의 삶에 대한 좀 더 많은 정보를 전했습니다.

“남아있는 기록 중 하나를 보면 그가 도쿄 지역 출신이라는 것 같습니다. 사쿠라가와 씨는 리더와 같은 곡예단의 중요한 일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커스 공연자들은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공연만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곡예단이 어떻게 호주에 오게 됐을까요?

스티브 도슨 씨는 어떻게 사쿠라가와의 곡예단이 멜버른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도착하게 됐는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시 일본에는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온 많은 사업가들과 기업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업가 중에는 서커스 매니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탄 배는 인도로 먼저 갔고 그곳에서 영국으로 바로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업가들은 계약을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그들의 계약은 프랑스 기업가로부터 영국 기업가에게 거래되었고, 토마스 킹이라는 이름의 영국 기업가는 실제로 그들을 호주로 직접 데려오게 됩니다. 이렇게 단지 우연으로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사쿠라가와 씨는 1884년 사망했고 시드니의 룩우드(Rookwood Cemetery)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아들 이와르는 디키노스키 서커스단과 늘어나는 가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또한 11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앞날은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어두워졌고,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과 함께 엄청난 변화를 맞게 됩니다.

사쿠라가와 씨는 이전에 귀화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이와르 씨는 백호주의 정책 이후 시민권을 신청했고, 결국 시민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계 호주인들의 모임인 닛케이(Nikkei)에서 활동하며 스티브 도슨의 연구를 돕고 있는 엘리샤 레이 씨는 이와르 씨의 말년기가 비극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와르 씨는 당시 호주에서 일본인들이 대우받는 방식에 있어서 많은 불운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권리를 얻지 못했고 시민권도 없었습니다. 즉 그는 호주 시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된 자녀들과 한동안 함께 지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분명 모튼 베이의 더니치 섬에서 지냈는데, 제 생각에 이 곳은 정신병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무일푼이었으며 무국적자인 채로 투웅 묘지(Toowong cemetery)에 묻혔습니다.”

영국과 일본 제국 간의 긴장감이 높아지자, 디키노스키 가족들은 그들 선조의 출신배경을 적극적으로 숨기게 됩니다.

이와르 씨의 증손자인 스티브 도슨 씨는 이러한 비극적인 경험이 서커스단으로서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물론이고 나머지 가족들의 뿌리를 자르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증조할아버지가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렸고 11명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일본계임을 밝히지 말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서커스 생활이 실제로 그들의 일본계 유산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커스 생활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수천 명의 일본계 호주인들이 강제 수용됐습니다.

디키노스키 가족들은 그들의 혼혈 선조가 동양인이라는 특징을 숨겼고 이름 철자가 일본계 이름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마조리 딘 씨는 디키노스키 가문의 또 다른 후손으로 전쟁 동안 가문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쟁 기간 동안 많은 일본인과 이탈리아인 후손들이 수용소에 강제 수용됐고, 저는 아버지가 항상 그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 아버지도 한동안 사라졌었고, 우리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쨌든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강제 수용을 피해 숨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 이모 중 한 명은 말년에 매우 일본인처럼 보였는데, 항상 집을 옮기곤 했는데 아마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족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