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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누구이며, 전 세계 금융의 핵심 인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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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틀과 본질 이해하기 ・ 2024. 2. 1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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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인은 누구?

유대인은 지금부터 약 4000년 전에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사람들을 시조로 한다. 유대인은 4000년에 달하는 긴 역사 동안 방랑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유대교의 신앙’이라는 신념 하나로 견뎌왔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서 유대인은 꼭 고대 유대 민족의 혈족이 아니어도 된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면 된다. 따라서 현대 유대인은 백인, 흑인, 중동인, 아시아인 등 다양하다. 그들은 유대교라는 종교를 낳고 《구약 성경》을 편찬했다. 《구약 성경》은 기원전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가르침을 모은 책이다.

출처 : 픽사베이

유대 민족은 가나안 땅(현재의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1600년경에 이집트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1250년경(유대교 기준) 예언자 모세가 노예로 살던 유대인들을 인솔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가나안에 다시 터전을 잡았다. 그러나 가나안 주변에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왕국, 고대 로마 제국 등 강대한 국가들이 차례로 출현하면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서기 70년, 마침내 고대 로마 제국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유대인은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 뒤로 1948년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기까지 유대인은 나라 없는 방랑의 민족이 되었다.

출처 : 픽사베이

2. 유대인이 대부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

유대인이 나라를 잃기 전, 그들의 생업은 대부분 농업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 농민들에게는 물을 논밭에 대는 관개가 잘 정비된 농업 기술이 있었다. 덕분에 양질의 보리, 대추야자,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나뭇진에서 얻은 송진으로 원료, 접착제, 향료 따위를 만드는 발삼은 똑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되었다. 그러나 자기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 대부분은 비단 직물 직공, 염색업자, 재단사, 도축업자, 유리 직공, 대장장이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러한 기술직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능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머지않아 이런 직업도 잃게 된다.

7세기 무렵, 서유럽에서 ‘길드’가 탄생했다. 길드란 직업상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종 직업 종사자들이 모여 만든 모임을 말한다. 길드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동시에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냈기에 강한 힘이 있었다. 상인뿐만 아니라 수공업자, 직공의 길드도 생겨났다. 길드에 가입하지 않으면 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차단 제도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직은 동업자 간의 서약을 통해 결성되는데, 기독교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유대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여러 직업에서 사실상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상당수 유대인들이 대부업을 하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어느 정도 돈이 생기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생활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원래 유대교도 대부업을 공공연히 용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독교인이든 유대교인이든 대부업 종사자는 있었다.

3. 대부업을 지속하다 추방당하다.

그런 배경 속에서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가톨릭교회의 세계 회의)에서 기독교인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했다. 이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폭리를 금하는 기술, 이를테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빌려주어라’라는 내용 등에 따른 것이다. 유대교에도 구약 성경에 ‘가난한 자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고 돈을 빌려줘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어 표면적으로는 이자를 받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프랑스에서 유대교 지도자 요셉 벤 사무엘드 엘렌이 “우리 유대인은 국왕과 귀족에게 세금을 내고, 생활비도 벌어야 하므로 대부업을 금지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 뒤로, 유대인들은 공공연하게 대부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유대인 대부업은 처음에는 전당포로 시작해 나중에는 궁정이나 귀족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까지 나타났다.

기독교가 대부업을 금했지만 언제나 돈이 필요한 사람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 대부업의 이율은 30~60퍼센트로, 오늘날 사채업보다도 높았다. 게다가 복리 계산이어서 조금만 변제가 늦어도 갚아야 할 돈이 빌린 원금의 몇 배로 불어났다. 당연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되거나 재산을 빼앗기는 사람이 생겼다. 이는 결국, 유대인을 향한 증오를 낳았다.

1275년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유대인의 대부업을 금지했다. 그 대신 유대인들이 농업이나 기타 산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충분한 땅을 받지 못했고, 길드에서도 추방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몰래 대부업을 이어 갔다. 그러다가 국왕의 분노를 샀고, 1290년 유대인들은 영국 추방 명령을 받았다.

다른 서유럽 나라도 영국에 이어 차례로 유대인을 추방했다. 영국이 내린 유대인 추방 조치를 서양의 여러 나라들도 차례로 따랐다. 추방되지 않더라도 ‘게토(ghetto)’라고 불리는 거주지에 반강제로 갇혀 지내며 시민권도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토라 불리는 유대인 거주지는 15세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리스도를 믿는 중부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좁은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또한 당시 유럽 종교 회의에서는 ‘유대인 상점에서 물건을 사지 마라’, ‘유대인과 성관계를 맺으면 화형에 처한다’, ‘유대인은 다윗의 별을 가슴에 달아야만 한다’ 등도 정했다.

출처 : 픽사베이

유대인이 서양 국가들의 다른 민족처럼 시민권을 얻는 시점은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유대인은 그들을 받아 주는 곳을 찾아 전 세계를 떠돌았다. 유대인 특유의 뛰어난 돈벌이 수완을 상징하는 단어인 ‘유대 상법’은 방랑의 민족이라는 그들의 성질과 크게 관련된다.

4. 유대인이 금융, 무역 등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전 세계로 흩어진 것과 관련있다.

그들에게 방랑한다는 말은 곧 각 지역의 정보를 많이 가졌다는 뜻도 되었다. 한 나라에 정착하기 않고 모국이 없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모든 국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주었다. 그러한 관점으로 유대인들은 여러 지역의 문화와 물건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인도의 계산 방법을 유럽에 소개하고, 아라비아 숫자를 동양과 서양에 보급했다. 또 커피, 담배를 유럽에 널리 퍼뜨렸다. 그동안 세계 금융 거래 시스템 개발에 유대인은 큰 역할을 해왔으며, 이 시스템을 구축한 사람도 유대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의 여러 권리를 박탈하고 결혼과 출산도 제한하는 일은 상당수의 기독교 국가가 해 온 일이다. 이런 박해는 유대인의 정신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소수자이자 이교도인으로서 박해를 받았다. 십자군 원정 때는 유대인 거주지가 때때로 습격당했다. 그들은 방랑생활을 하면서 무역업과 금융업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친척과 지인이 전 세계로 흩어져 거래처 만들기가 쉬웠고, 세계 각지를 오가는 무역상 직업 특성상 박해를 받으면 바로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동안 유대인들은 양측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 유대인 무역상들은 대체로 양측으로부터 온당한 대우를 받았다. 유대인은 무역 중개업자로서 양측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서구 여러 나라에 아랍 국가들의 진귀한 물품을 들여왔고, 아랍 국가에는 비단, 향료 등을 들여왔다. 서유럽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13~15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에 도달했다. 네덜란드의 세계 진출과 함께 유대인들도 중남미의 브라질에 진출했다. 중남미의 설탕, 커피 무역에는 유대인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유대인의 활약은 북아메리카와의 무역에서도 두드러졌다. 유대인들은 보석, 산호, 직물, 노예, 코코아 등의 무역을 주도했다.

유대인 무역상들은 노예무역도 담당했다. 당시의 무역은 원칙적으로 물물교환이었다. 만약 상대방의 물품을 원하더라도 자신에게 교환할 만한 물품이 없을 때는 마지막 수단으로 노예를 이용했다. 노예무역에는 상당한 위험이 뒤따랐다. 기독교 국가는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하는 일을 금지했고, 이슬람 국가는 유대인이 이슬람교인 노예를 소유하는 일을 금지했다. 원칙적으로 유대인은 노예무역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유대 상인들은 감시하는 눈을 피해 노예무역을 이어갔다.

유대인은 경제 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은 그들의 정교한 금융 구조, 비즈니스 구조를 이용해 전 세계 각국 경제에서 중추 역할을 맡아 왔다. 세계사에 등장하는 여러 경제 대국의 이면에는 반드시 유대인이 있었다.

기록에 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부업체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무라슈 상회’이다. 여기에 자금을 댄 유대인 70명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다. 기원전 5세기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도 유대인들이 대부업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출처 : 픽사베이

유대인들은 고대부터 환전, 환율 등의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유대인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각 나라에서는 이들로인해 다종다양한 화폐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화폐를 사용하려면 환전이 필수였다. 환전상이 발달할 수밖에 없던 요인이다. 환율 제도가 없던 당시에는 화폐의 환전은 한마디로 업자 마음대로였다. 업자들은 환전으로 큰 이익을 냈다.

환전상은 대부업도 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밭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은 묵인되었다.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환전상에게는 대부업을 겸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유대인 환전상 중에서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환전, 환율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로, 오늘날에도 금융의 핵심이다. 현재 사용되는 금융 제도 중에는 유대인이 개발하고, 발명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유가증권’을 발명한 사람도 유대인이다. 유대인에게 유가증권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다. 언제 추방당할지, 언제 재산을 몰수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산을 현물로 가지는 일은 위험했다. 현물은 한번 빼앗기면 되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증권은 그것을 가진 본인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가 없었다. 또 추방당할 때도 종이 한 장만 가지고 가면 된다. 유대인에게 유가증권은 여행자용 수표와 같았다. 그래서 증권거래소가 설치됐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 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했다. 영국 최초의 전문 주식 중개인도 유대인이라고 한다. 또 무기명 채권을 만든 사람도 유대인이었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이 갑자기 재산을 몰수당하는 일은 종종 벌어졌다. 특히 지중해 무역을 할 때 스페인 해군 등은 배나 선적물이 유대인의 소유임을 알게 되면 합법적으로 몰수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해상 보험을 포함해 무역과 관련된 모든 서류에 허위로 기독교인 이름을 기재했다. 이것이 나중에 무기명 채권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용 대출을 시작한 사람도 유대인이라고 한다. 신용 대출은 담보를 잡지 않고 돈을 빌려 주는 제도이다. 담보의 가치로 대출할 금액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용도에 따라 대출 금액과 이자를 결정한다. 이로써 담보가 없는 사람도 사업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은 단일 인종이나 국적이 아닌, 하나님과 공유된 역사, 문화, 언약을 지닌 민족종교 집단입니다.역사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중세 시대에 상인과 무역상으로서 자본을 축적하고, 강력한 소통망을 구축하며, 문해력과 산수 능력을 갖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금업과 은행업에 관여했습니다. 유대인을 세계 금융의 핵심 인물로 인식하는 것은 역사적 고정관념에 뿌리를 둔 반유대주의적 은유이며, 이는 유대인이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부당하거나 비밀스러운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잘못 묘사합니다.

유대인은 누구인가?

  • 민족종교적 정체성:유대인은 민족종교 집단입니다. 즉, 그들의 정체성은 민족적 조상과 종교적 신념 및 관행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 공유 유산:유대인들은 오랜 역사와 공통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는 신과의 계약이 있습니다. 
  • 디아스포라:서기 70년 로마의 추방과 같은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이 전 세계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땅과의 연결을 유지하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형성했습니다. 

유대인이 금융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은 왜 생겼을까?

  • 중세 대금업: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이자( 고리대금 )를 받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 대부업자와 은행가들이 틈새시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 누적 자산:유대인들은 이미 상인과 장인으로서 자본을 축적해 신용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 네트워킹 및 커뮤니케이션:분산된 지역 사회는 의사소통과 무역을 위한 강력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이를 통해 재정적 기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 기술 및 교육:문해력, 산수 능력, 종교적으로 공인된 계약 집행 기관에 대한 전통은 금융 활동을 위한 튼튼한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반유대주의적 “주요 인물” 트로프

  • 고정관념:유대인을 세계 금융의 주요 설계자로 보는 생각은 유대인을 경제를 조종하거나 비밀리에 통제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해로운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입니다. 
  • 역사적 선전:이러한 신화는 헨리 포드의 “국제 유대인” 과 같은 반유대주의 선전을 통해 퍼져나갔으며 , 이러한 편견을 정당화하고자 했습니다. 
  • 경제적 반유대주의:유대인과 금융의 연관성은 종종 경제적 반유대주의의 표현인데, 경제적 반유대주의는 독특하고 오래된 반유대주의의 한 형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