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jo Paterson의 아들 Hugh는 시를 통해 Rats of Tobruk의 추억을 생생하게 간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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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jo Paterson의 아들 Hugh는 시를 통해 Rats of Tobruk의 추억을 생생하게 간직했습니다.
ABC 센트럴 웨스트 / 작성자: Hamish Cole
게시일: 2024년 4월 23일 화요일 오전 6시 22분 2024년 4월 23일 화요일 오전 6시 22분
여자 옆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의 흑백 사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반조의 아들 휴 패터슨과 그의 아내 로나 화이트. (제공: 호주국립문서보관소)

제2차 세계 대전 중 토브루크 포위 공격에서 독일 포병의 총격을 받았을 때에도 휴 패터슨은 가족의 시 유산을 이어갔습니다.

유명한 부시 시인 반조 패터슨(Banjo Paterson)의 아들인 휴(Hugh)는 1941년 8개월 동안 추축국 군대를 저지한 후 토브룩의 쥐(Rats of Tobruk)로 알려지게 된 14,000명의 호주 군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자신의 시를 파괴했고 그의 작품을 모아둔 단 하나의 컬렉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시인의 유산은 쥐들이 직면했던 전쟁 상황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뉴사우스웨일즈 중서부의 예발(Yeval)에서 반조 패터슨 박물관(Banjo Paterson Museum)을 운영하는 알 캔트렐(Al Cantrell)은 “그는 항상 자신의 시가 아버지의 시만큼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시를 파괴하고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토브루크의 삶이 어땠는지 우리에게 설명함으로써 놀라운 유산을 남겼습니다.”

박물관 전시물 앞에 서 있는 노인
Alf Cantrell은 Hugh Paterson의 시가 그의 아버지의 시 수준에 있다고 믿습니다. (ABC 센트럴 웨스트: 해미시 콜)
북아프리카 항구 도시는 연합군의 이집트 방어와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 때문에 반복적인 공격과 거의 매일의 포격과 폭격을 당했습니다.

휴 패터슨(Hugh Paterson)이 갈등을 정의하는 구절을 쓴 것은 832명의 호주인이 사망하는 폭력과 일상적인 전투의 불협화음 속에서였습니다.

Cantrell 씨는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시 중 5개 미만이 보존되었지만 그 시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통찰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Banjo의 스타일과 매우 유사합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이름과 장소를 사용하고 그 주변에 멋진 이야기를 엮어냅니다. 그는 즉시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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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살아있는 ‘토브룩의 쥐’는 단 한 명, 103세의 톰 프리차드(Tom Pritchard)입니다. 그는 들것 운반자 역할을 했습니다.

Tobruk 쥐 협회의 Lachlan Gaylard는 이것이 Paterson 씨의 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고 믿었습니다.

게일라드 씨는 “이것은 삶이 어땠는지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동시대 기록”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토브룩이라고 부르는 이 곳’이라는 시는 토브루크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휴 패터슨의 시에서 나올 유산은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갈등에 대한 더 큰 이해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시를 가리키는 남자
휴 패터슨(Hugh Paterson)의 시 ‘그들이 토브룩(Tobruk)이라 부르는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가장 유명한 시입니다. (ABC 센트럴 웨스트: 해미시 콜)
캔트렐 씨는 휴 씨에게 ‘반조 주니어(Banjo Junior)’라는 별명이 붙었고 아버지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당혹감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시가 아버지의 시만큼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시를 써서 군대에게 낭송한 다음 그것을 파괴하곤 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시인이자 토브루크 군대의 일원으로서 훌륭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의 시집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 시들은 전 세계 사방팔방으로 퍼져 있습니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의 흑백 사진
휴 패터슨(Hugh Paterson)은 1941년 8월 토브룩을 떠난 마지막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ABC Central West: Hamish Cole)
잔인한 갈등
1941년 1월, 호주군은 리비아 해안 마을을 점령했고 추축국은 트리폴리에서 1,500km에 달하는 사막을 가로질러 보급품을 가져오도록 강요했습니다.

4월에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주로 제9여단으로 구성된 호주군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경에 있는 기계 도랑과 배경에 있는 폭발의 흑백 사진
토브루크 포위 공격은 4월에 시작되어 12월에 끝났으며, 호주군은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제공:호주 전쟁기념관)
게일라드 씨는 “그들은 덩케르크나 대피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토브룩은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 열쇠였다”고 말했다.

“이집트와 수에즈를 잃으면 사막에서의 중동 전역 전체를 잃었을 것이므로 당시 토브룩은 전쟁 승리의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게일라드 씨에 따르면 호주 군인들이 잔인한 상황에 직면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등지고 있었고 자원도 부족했으며 낮에는 무더위가 있었고 밤에는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씨였습니다.

“토브룩을 통과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성들 사이에 훌륭한 동지애가 형성되었습니다.”

Banjo Paterson’s son Hugh kept Rats of Tobruk memory alive with poetry

ABC Central West

 / By Hamish Cole

Posted Tue 23 Apr 2024 at 6:22amTuesday 23 Apr 2024 at 6:22am

Black and white photo of a man with a moustache next to a women
Hugh Paterson, son of Banjo, and his wife Rhona White, following his service in World War II.  (Supplied: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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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 as he came under fire from the German artillery at the siege of Tobruk in World War II, Hugh Paterson continued his family’s legacy of poetry.

As the son of renowned bush poet Banjo Paterson, Hugh was among the 14,000 Australian soldiers who have become known as the Rats of Tobruk after holding off Axis troops for eight months in 1941.

But he often destroyed his poems and there’s no single collection of his work.

Now, the poet’s legacy is being praised for documenting the wartime conditions the Rats faced.

“He always thought his poetry was never as good as his father’s,” said Al Cantrell, who runs the Banjo Paterson Museum in Yeoval in Central West New South Wales.

“He would destroy his poems and not share them.

“But he’s left a wonderful legacy by giving us a description of what life was like in Tobruk.”

An older man standing in front of a museum display
Alf Cantrell believes Hugh Paterson’s poetry is at the level of his father’s. (ABC Central West: Hamish Cole)

The North African port town was subject to repeated assaults and almost daily shelling and bombing, due to its importance for the Allies’ defence of Egypt and the Suez Canal.

It was within this cacophony of violence and daily battles with the elements, which saw 832 Australians killed, that Hugh Paterson penned verses that would define the conflict.

Mr Cantrell said, while less than five of his poems on the topic had been preserved, they’re incredibly insightful.

“His style is very similar to Banjo’s,” he said.

“He uses names and places and weaves a great story around them. He puts a picture in your mind immediately so you can see where he is and what it is he is se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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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only one ‘Rat of Tobruk’ who is still alive today, 103-year-old Tom Pritchard. He served as a stretcher bearer. 

Lachlan Gaylard from the Rats of Tobruk Association believed this makes Mr Paterson’s poetry all the more special.

“It is really the only contemporaneous record that we have of what life was like,” Mr Gaylard said. 

“The poem ‘This Place We Call Tobruk’, really is the most accurate depiction of life in Tobruk.

“The legacy that will come out of Hugh Paterson’s poetry is that he has given many people a greater understanding of the conflict.” 

A man pointing to a poem
Hugh Paterson’s poem ‘This Place They Call Tobruk’, is his most famous verse from World War II. (ABC Central West: Hamish Cole)

Mr Cantrell said Hugh was nicknamed “Banjo Junior” and felt embarrassment when compared to his father’s work.

“He always thought his poetry was never as good as his father’s. He would write a poem, recite it to the troops and then destroy it,” he said.

“He has left a wonderful legacy as a poet and a member of the armed forces in Tobruk.

“It is unfortunate that we don’t have a collection of his poems. They’re spread to the four winds around the world.”

Black and white photo of a man with a moustache
Hugh Paterson was one of the last to depart Tobruk in August 1941.  (ABC Central West: Hamish Cole)

A brutal conflict 

In January 1941, Australian troops captured the Libyan coastal town, forcing the Axis powers to bring supplies across 1,500 kilometres of desert from Tripoli. 

When the siege began in April, the Australian troops, made up predominantly of the 9th Brigade, were told there would be no surrender. 

Black and white photo of a machine trench in the foreground and an explosion in the background
The siege of Tobruk began in April and ended in December, with Australian troops under constant fire. (Supplied: Australian War Memorial)

“They were told there would be no Dunkirk, there would be no evacuation but looking back on it with historical perspective, Tobruk was the key to holding Egypt and the Suez Canal,” Mr Gaylard said.

“If they lost Egypt and the Suez, they would have lost the entire Middle Eastern campaign in the desert so Tobruk at that time was pivotal to winning the war.” 

It was within this context, that the Australian soldiers faced brutal conditions, according to Mr Gaylard. 

“They had their backs against the sea, they were under-resourced and it was sweltering heat during the day and freezing cold nights. 

“It built amongst the men a great comradeship because they thought if they could get through Tobruk they could get through anything.”